Yubin Oh


FASH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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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EL AND FILL

너, 나, 우리. 가여운 것들을 위하여.

Editor: Oh Yubin
Art: Jeong Minjae
Text about Film <The Poor Things>
<DAZED> KOREA, Spring 2024 Issue


추위 속에서도 피어나는 소소한 온기는 마음의 따뜻함을 한껏 증폭시킨다. 그 덕에 겨울이 좋아지려던 찰나. 그럼에도 나는 봄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신작 영화 <가여운 것들> 때문에. 보고 듣고 느끼고 배운 것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럼 나는 쌓이기만 하겠구나, 계속 무거워지겠구나 싶었다. 가벼워지고 싶었다. 훨훨. 텅 빈 내가 궁금했다. <가여운 것들> 의 벨라가 그렇다. 자신의 삶을 경멸했던 벨라. 그리고 그에게 부여된 새로운 삶. 우리는 그 삶이 채워지는 과정을 지켜본다. 여러 상황과 인물들을 마주하며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사고하는 벨라. 그는 그렇게 성장한다. 텅 빈 백지의 벨라가 그렇게 조금씩 채워져간다. 물론 우리는 누구나 그 과정을 거쳐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라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은 유독 흥미롭다. 닥치는 대로 흡수하면서도 순수하게 감각하기 때문에. 


뜨거운 뜀박질
벨라의 순수함은 통제 불가다. 주변 사람들을 당황시키기도, 상처 주기도 한다. 특히 벨라의 ‘성적 본능’이 그렇다. 단순한 성욕이라 치부하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나 투명하게 성적 쾌락을 갈망한다. 그의 무의식의 방에는 문지기가 없다. 그래서 눈치 보지 않고 뜨거운 뜀박질을 한다. 쉴 새 없이. 그렇게 자신을 탐험하고 정신적 삶의 토대를 이루어간다. 


나를 온전히 내맡기는 것이 가능할까? 요새 음악과 춤이 참 매력적인 장르라고 느낀다. ‘(리듬에 혹은 음악에) 몸을 맡긴다’는 표현을 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르 같달까. 자꾸 힘을 주게 되는 세상에서 힘을 빼게 해주는. 뒤뚱뒤뚱 아기같이 걷던 벨라가 신체의 자유를 얻자 춤을 춘다. 온몸을 내맡긴 채. 벨라의 자유로움이 일렁인다. 

돈이라는 질병
“돈은 질병이나 마찬가지예요. 
돈이 없는 사람들을 병들게 하는.
내가 뭐라고 이런 안락함을 누리죠?

냉소주의자 해리를 마주한 벨라. 그는 티 없이 맑은 벨라에게 잔혹한 현실을 보여 준다. 그 마음 알지. 너무 깨끗한 건 더럽히고 싶은. 부러워서? 혹은 얄미워서. 나도 그런 순간이 그리워서. 아무튼, 벨라는 그렇게 부조리한 사회를 알아간다. 그래도 그는 여기서 좌절과 분노보다는 희망을 택한다. 
연민은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않는다. 솔직히 우리는 연민하며 안도한다. 아프리카 기아를 보며, 참혹한 전쟁을 겪는 사람들을 보며 느끼는 연민에는 ‘다행’이라는 감정이 포함되어 있다. 벨라는 연민을 넘어 공감한다. 벨라가 흘리는 눈물도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않는다. 당장은. 하지만 적어도 이 마음은 언젠가 닿을지도 모른다.

독서하는 매춘부
영화의 중반부부터는 벨라에게서 아기 같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난 이때의 벨라를 ‘형성 중인 벨라’라고 부르고 싶다. 원초적 욕구 충족을 넘어 자신만의 가치를 형성 중인 벨라. 때때로 파괴적이도록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를 넘나든다. 돈이 부족해진 벨라는 자본주의의 전선에 뛰어든다. 그가 선택한 첫 번째 직업은 매춘부. 파리의 매음굴에서 자유롭게 섹스하고 독서한다. 그는 남성의 일방적 선택에 의해 배정되는 매춘 시스템에 의문을 품다 새로운 룰을 제안한다. 
벨라 안에 자라난 니체를 감상한다. 벨라에겐 절대적인 가치란 존재하지 않으며 자신의 가치에 앞선 개념은 없다. 신, 도덕, 국가, 이념 등 절대적으로 숭배되는 것일지라도 그에게 그것들은 ‘타인의 가치’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벨라는 이기적인가? 적어도 그는 자신이 지향하는 가치와 도덕에 비겁하지 않다. 

피조물에서 창조자로
종종 꽂히는 단어들이 생긴다. 단어 자체만으로도 매력적이라 굳이 문장이 되지 않아도 완전하게 느껴지는 그런 단어들. 그중 하나가 ‘창조’다. 언젠가 마르크스의 지동설적 인간관에 대해 읽은 적이 있다. 수많은 밑줄 속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문장은 ‘인간은 스스로 창조한 세계 속에서 자기를 직관한다’. 만들어진 세계를 사는 것이 아닌 자신이 세계를 만들어가야만 한다. 그곳에 진정한 내가 있으니. 고드윈 벡스터의 피조물이었던 벨라는 비로소 창조자가 되었다. 만들어진 세상을 너머 주체적으로 세상을 만들어갔다. 인간은 행동함으로써 인간이 되어간다. 인간, 그 주체의 기원에는 ‘행동’이 있다. 벨라는 말랑말랑한 두뇌와 순수함이라는 필터로 세상의 것들을 흡수했다. 매우 공격적으로. 그리고 이를 천천히 곱씹고, 소화했다. 그는 그렇게 피조 물에서 창조자로 거듭났다. 

자유
오랫동안 자유를 동경했다. 물론 지금도 그렇다. 또 온전한 자유가 무엇인지 늘 궁금하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과 영화 속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삶의 중심에서 자유를 탐구한다. <비브르 사 비>의 나나와 <생의 한가운데>의 니나. 그들의 삶을 체험하는 것만으로도 큰 울림이 있다. 하지만 막상 현실에는 자유가 존재할 수 있을까 싶다. 사람은 곁에 있는 사람들과 속해 있는 환경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심지어 나의 과거와 현재, 미래로부터 자유롭기도 힘들다. 게다가 시스템 안에서 부여된 자유, 그건 진정한 자유가 아니니까. 탈출을 통해 얻은 자유도 또 다른 속박을 생산해 낸다. 카프카적이다.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영화는 늘 이 모순을 꿰뚫고 있었고, 그래서 그의 영화를 볼 때면 가슴이 먹먹해졌다. 내가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 또렷하게 직시해 버려서. 나의 비겁함과 생생한 현실을 아는 것은 모르는 것보다 더 답답하다. 벨라가 부럽다. 그의 경험, 그의 삶은 순전히 그의 것이다. 사회적 규범과 타인의 시선 등 온갖 외적인 것으로 범벅이 된 선택이 아닌 자신의 내면에 귀 기울여 얻은 대답을 통해 차곡차곡 채웠으니. 원초적 욕망도, 지성도, 감성도. 벨라는 순수하게 채웠다. 난 그를 보며 자유에 앞선 ‘순수’를 갈망한다. 

Image :  © The Walt Disney Company Korea